레이나 시리즈/창작 소설 『에일렌시아의 꽃수호자』

<1부 - 릴리아 2화> 울고 있는 사람을 먼저 봤어

단단한 레이나 2025. 6. 21. 17:13

📘 『에일렌시아의 꽃수호자』

제1부. 꽃의 수호자 릴리아
2편. 울고 있는 사람을 먼저 봤어

 

 

 

모두가 릴리아를 사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주는 기적을 사랑했다.

왕궁의 안뜰, 백련 정원에 릴리아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 그녀의 발길이 닿자, 갈라진 흙이 부드럽게 솟구치며 새싹을 틔웠고 묘하게 불안하던 정원의 공기는 마치 숨을 쉬듯 포근해졌다.

 

“이 아이가… 수호자입니까?”

 

한 고위 제관이 경건한 목소리로 물었고, 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꽃의 여신께서… 다시 숨을 쉬게 하셨다.”

 

그날 이후, 릴리아는 왕궁의 중심이 되었다. 축복처럼, 성물처럼, 예언의 실현처럼.

하지만 곧 그녀는 깨달았다. 그 중심에는 아무도 함께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릴리아가 웃으면 사람들은 안심했다. 릴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면, 온 궁이 얼어붙었다. 그녀가 말없이 창밖을 보았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불길하다’며 성물을 태우고, 기도를 올렸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녀가 웃으며 해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래도… 웃어주세요. 릴리아님.”

“백성들이 불안해합니다.”

“소문은 순식간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소는 의무가 되었고 미소 이외의 모든 표정은 불편한 진실이 되었다.

 

궁중 정원사는 매일 새로운 꽃을 심었다. 릴리아가 기뻐할 거라며, 꽃길이 끊기지 않도록 동선을 조정했다. 하지만 릴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이 길에 갇혀 있는가.’


감정의 억제는 언제나 ‘보호’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다. 왕비는 그녀의 방에 수면 향초를 피우게 했다.

 

“이건 너를 위한 거란다. 릴리아. 네가 불안하면, 온 나라가 불안해져.”

 

신하들은 그녀의 손에 항상 향긋한 허브차를 쥐여주었다.

 

“안정을 위해서예요. 요즘 밤에 울지 않으시죠?”

 

치유사들은 매주 그녀를 진찰했다. 심박수, 체온, 감정 진폭. 그녀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폭발할지도 모르는 자연 현상처럼 다뤄졌다. 릴리아는 이 감시를 ‘사랑’이라 불러야 했다. 그들은 언제나 말했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란다.”

“사랑하니까 조심해야지.”

“우리는 너를 지키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그녀의 밤은 너무 조용했고, 그녀의 하루는 너무 정제되어 있었으며, 그녀의 감정은 너무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든 감정은 최소화되었다.

기쁨은, ‘지나치지 않게.’

슬픔은, ‘표현하지 않게.’

분노는, ‘없어야 하며.’

외로움은, ‘감정의 사치.’

릴리아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웃고 있어요. 그러니 모두 괜찮은 거죠?”

 

그녀의 미소는 완벽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

왕궁은 숨 막히게 평온했고, 릴리아는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런 흔들림 없이. 오직 평화만이 유지된 채로.

그러나 그때, 가장 오래 전부터 에일렌시아를 지켜보고 있던 꽃의 여신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것은 한 번 반복된 일이었다. 에일렌시아는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너무나 길고 부드럽고 조용하게. 모두가 웃었고, 모두가 고요했다. 그러나 그 평온은 감정의 억제로부터 만들어진 가면이었다. 질투, 슬픔, 외로움, 분노… 그 모든 감정은 ‘위험하다’는 이름 아래 말려버렸고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썩어가는 고요함이었다. 그 썩은 감정의 침묵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첫 번째 ‘어둠’이었다.

 

그래서 여신은 릴리아를 보냈다. 사랑의 아이, 감정의 흐름을 품은 아이. 감정이 살아 숨 쉬는 ‘첫 번째 존재’로서. 그녀는 웃고 울고 사랑했고, 기뻐하며 슬퍼했으며, 에일렌시아의 생명을 다시 피워냈다.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녀를 찬미하고, 축복하고, 신성화했다.

 

하지만 그것이 두 번째 반복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두려워했다. 감정의 요동을, 불가해한 움직임을, 그리고 그 힘의 진원지인 릴리아를.

 

"감정은 위헙합니다."

"릴리아님의 감정이 나라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수호자께선 평온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릴리아를 웃음으로 가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라는 명목으로, 감정의 자유를 빼앗은 것이다.

꽃의 여신은 침묵했다. 그녀는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엔 다를 수 있을까. 이번엔 감정이 흘러갈 수 있을까. 이번엔 릴리아가 스스로를 잃지 않고, 그녀가 사랑하는 에일렌시아를 계속 유지시켜줄 수 있을까. 그러나 릴리아는, 점점 물음표만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요?”

 

그녀의 가슴에 흐르던 감정의 강이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사랑은 고요하게 식고, 기쁨은 조용히 일그러졌으며, 외로움은 이름 없는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물은 다시 한 번, 침묵 속에서 마른 채 사라지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고 억지 미소를 지으면 꽃은 피었다. 그러나 릴리아의 진짜 감정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왕궁의 하루는 언제나 정제된 질서 속에서 흘렀다. 새벽 종이 세 번 울리고, 정원사는 장미 울타리의 이슬을 털어내고, 궁녀들은 릴리아의 거처에 조용히 향기로운 차를 올렸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정원은 그녀의 등장에 맞춰 피어났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릴리아, 다음주부터 견습생들에게 식물마법의 기본을 가르쳐다오.”

 

왕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릴리아는 황금색 융단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폐하, 제가 감히…”

“너는 꽃의 여신이 남긴 수호자다.”

 

왕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이 땅에 생명이 피는 이유이자,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는 존재다. 너의 손끝에서 나오는 생명이 곧 교훈이다.”

 

왕의 말은 명백한 명령이었다. 릴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예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절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엔 무언가 빠져 있었다.

 

‘당신의 감정은 필요 없습니다’라는 말.

 

그녀는 왕궁을 나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수호자인데… 수호받지 못하는 존재인가 봐.”

 


 

왕궁 안에는 공식 지도에조차 표기되지 않은 작은 숲이 하나 있었다. 후원 깊은 곳, 오랜 궁중 기록에도 몇 줄만 남아 있는 ‘감람의 숲’. 수백 년 전, 이 땅에 생명을 불어넣은 꽃의 여신이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며 한 그루의 나무를 남겼다고 전해지는 곳. 그곳은 신성하다기보단 잊혀진 장소였다. 정원사들조차 손대지 않는, 잡초와 이끼가 뒤덮인 돌계단. 길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햇빛조차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곳에는 하나의 나무가 있었다. 아무 빛도 품지 않은 잿빛 줄기와, 계절을 가늠할 수 없는 푸르고 어두운 잎. 수백 년 전, 꽃의 여신이 떠난 자리에 남긴 두 그루 중 하나, 그림자의 감람나무였다.

 

릴리아의 탄생을 알린 왕궁 정원의 감람나무는 신탁을 내린 빛의 나무로 모든이들의 칭송을 받고 관리되어 왔지만, 이곳에 있는 그림자의 감람나무는 모두에게 잊혀졌다. 이 나무는 한 번도 피어난 적이 없었다. 기적도, 환희도, 축복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왕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정원사들조차 ‘버려진 숲’이라 불렀다.

 

그림자의 감람나무

 

어린시절 릴리아가 우연히 그 숲으로 걸어 들어갔을때  평소라면 그녀가 걷는 길마다 꽃이 피어나고, 하늘의 햇살조차 그녀를 중심으로 부드럽게 내리쬐었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 숲이, 그녀의 존재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처럼. 릴리아는 그날부터 감정이 요동칠때면 아무도 모르게 감람의 숲으로 갔다. 

 

그래서 릴리아는 오늘도 감람의 숲으로 향했다. 그녀는 모든 정원을 평화롭게 피워내는 존재였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림 같은 왕궁의 백련 정원도, 비단결 정자도, 고운 꽃길도 모두 그녀를 ‘기적의 중심’으로 떠받들 뿐, 위로의 장소가 되어주진 않았다. 그래서 감람의 숲으로 향했다. 누구도 찾지 않고, 아무런 꽃도 피지 않는, 잊힌 정원.  잎이 쌓인 돌계단을 올라 이끼 낀 바위 아래, 나무의 그늘로 들어갔다. 그곳은… 세상과의 감정이 끊어진 장소였다. 릴리아에게 감정이 허락된 유일한 장소였다. 그곳엔 빛도, 바람도, 생명의 숨소리도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이끼 낀 바위에 조용히 앉았다. 

 

릴리아는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억눌러왔던 울음을, 아무 의식도 없이 흘려보냈다. 눈물이 떨어져도, 땅은 젖지 않았다. 감정이 무너져도, 나무는 침묵했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녀가 아무리 울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감정은 억지로 변화시키지 않았다. 감람의 숲, 이 그림자의 나무 아래에서만큼은 릴리아가 ‘감정 그 자체’로 있을 수 있었다.

 

“오늘도 잘 웃었어… 아무도 몰랐겠지.”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 

아무도 듣지 않길 바라면서,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바삭, 잎을 밟는 소리. 감람나무 아래, 들어올 리 없는 발걸음. 릴리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처음 보았다.

 

소년.


짙은 갈색 머리에, 마른 손을 가진 소년이 작은 삽과 솔을 들고 있었다. 바위 옆 이끼를 하나씩 치우며 점점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소년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릴리아를 보았다. 그는 깜짝 놀란 릴리아를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는 투명했고, 얼굴엔 놀람도 경외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을 만난 눈. 그는 릴리아 앞에 조용히 앉았다. 말도,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단지 손수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하얗고 낡은 손수건. 끝자락에는 조잡한 자수로 'Aiden'이라고 적혀 있었다. 릴리아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너… 나를 알아?”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릴리아에게 손수건을 내미는 에이든. 릴리아와 에이든의 첫 만남

 

“알아. 나라를 살렸다는 아이.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 꽃의 여신의 아이, 수호자 릴리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다 멈췄다. 그리고 묻는다.

 

“…그래서, 무섭지 않아?”

 

소년은 고개를 돌려, 감람나무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울고 있는 사람을 먼저 봤어. 그게 나한테는 먼저야.”

 

릴리아의 눈이 커졌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봐준 적이 없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수호자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나중 문제야. 지금은 그냥… 울고 있는 한 사람이고 그게 전부야.”

 

그 말에, 릴리아의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금이 가고, 그 금틈 사이로 아주 작은 무언가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안에서 처음 싹튼, 감정의 씨앗. 자신을 울고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 봐준 이 소년에 대한 감정.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 나를 무서워하지 않고, 위대하게 여기지도 않고, 단지… 마음이 아프다고 말해준 눈.

나는 혼자가 아니야.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아직 숨 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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